티스토리 뷰

생활정보

아서 리디아드

필수인포 2023. 4. 4. 00:43

아서 리디아드

세루티 외에도 또 다른 남반구 출신의 코치가 코치의 진정한 역할에 관해 값지고 길이 남을 교훈을 남겼다. 아서 레슬리 리디아드Arthur Leslie Lydiard 는 1917년 7월 6일에 뉴질랜드의 오클랜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작고 마른 소년이었는데, 아무런 지도도 받지 않고 학교 달리기 시합에 출전해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그는 오클랜드의 린데일Lynndale 육상 클럽에 가입한 후에도 오히려 럭비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달리기는 시합과 훈련 사이에 즐기는 일종의 쉬어 가기 운동이었고, 훈련되지 않은 그에게는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아서-리디아드
아서-리디아드


1940년대 중반에 린데일클럽의회장인잭돌란 Jack Dolan은 리디아드와 함께 5마일 달리기를 했다. 돌란은 더 나이가 많았지만 잘 훈련된 상태였고 리디아드는 그를 따라가느라 진땀을 흘렸다. 고작 스물일곱 살일 뿐인데 그렇게 기진맥진하다니, 더 나이를 먹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아서 리디아드는 자신의 형편없는 체력 수준을 인정할 필요가 있었고, 결국은 진
지하게 단련을 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되었다.


그는 일주일 내내 달리기를 실험하고 달리기에 관한 책들을 읽기 시작했으며, 매주 800미터 경주를 할 때 뒤따르는 고통이 기쁨으로 바뀔 정도 가 될 때까지 훈련하기로 결심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걷기를 권장했지만, 그는 그런 권유를 단호히 거부하고 하루에 달리는 거리를 12마일까지 늘렸다. 

 

가장 심할 때는 일주일에 총 250마일을 달리기도 했다. 나중에 그는 새벽 2시에 일어나 우유 배달 트럭을 몰고 나갔다가 그 일이 끝나면 다시 신발 공장에 일하러 가야 했기 때문에(그에게는 부양해야 할 처자식이 다섯이나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훈련 시간을 주말로 제한해야 했다.

 

리디아드는 아직 경주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이를테면 20마일을 달리는 고된 훈련을 하고 난 다음 날에는 반드시 좀 더 쉬운 훈련을 했다. 그런 식으로 열흘 정도 지나자 몸이 훨씬 강해진 것을 느꼈다. 이것은 몸이 완전히 분해되었다가 스스로 재조립하여 좀 더 높은 차원에 이르게 되는 방식이었다. 훈련에서는 균형을 찾는 것이 무엇보
다 중요했다.

 

리디아드는 대부분 혼자서 실험했다. 그러다 신발 공장의 동료 노동자인 로리 킹 Lawrie King이 그를 따르기 시작했고, 곧 인상적인 발전을 보여주었다.

 

그는 1945년 오클랜드 선수권대회 주니어부 2마일 경주에 출전해 우승을 차지했다. 그는 트랙 위에서 리디아드가 거둔 최초의 성공 사례였다. 다른 두 사람, 브라이언 화이트Brian White와 톰 허친슨Tom Hutchinson은 같은 해에 전국 크로스컨트리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다.


리디아드는 원래 코치가 되려는 계획이 없었다. 그러나 젊은 주자들이 평소보다 더 많이 훈련하라는 그의 조언을 듣고 성공을 거두자, 그는 용기를 얻어 본격적으로 코치 일을 하게 되었다. 린데일 측과 의견 차이와 행정적인 문제가 발생하자 리디아드는 그 클럽을 떠나 오와이라카Ovairaka에 거의 그 지역 출신 선수들로 구성된 달리기 훈련 단체를 조직했다. 리디아
드는 이렇게 말했다. “오와이라카가 4년 안에 린데일을 꺾게 될 것이다."

 

린데일은 그 나라 최고의 육상 클럽이었지만, 리디아드의 예언은 거의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리디아드가 자신의 생각을 완성하는 데는 9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가 마라톤을 지도할 때 그의 선수들은 예비 단계 동안 일주일에 최대 100마일까지 달렸는데 그중 매주 일요일에는 22마일의 장거리를 달렸다. 그 결과 그들은 지칠줄 모르는 놀라운 기초 체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들은 사실 빠르게 달리고 있을 때에도 달리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고된 훈련을 잘 소화해냈다. 대회 시즌이 가까워지자 그들은 달리는 거리의 양을 줄이고, 몸 상태를 최고조로 끌어올리기 위해 산악달리기와 속도 강화에 집중했다. 이미 그들의 기초 체력이 매우 탄탄해졌기 때문에, 그런 최상의 몸 상태는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다.


이것은 1950년대 초에 제시된 훈련법인데, 이 시기는 인터벌 트레이닝이 중장거리 달리기 세계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던 때였다. 리디아드는 인터벌 트레이닝보다는 평탄한 속도로 장거리를 달릴 것을 권장했다.

 

그의 훈련법은 훨씬 더 많은 양의 달리기를 주문하고 훈련 기간을 조절한다는 점, 그리고 심지어는 중거리 선수들에게도 20마일이라는 장거리를 달리게 했다는 점에서 새로웠다. 리디아드의 선수들은 마치 마라톤을 하듯 훈련했지만, 800미터 이상의 모든 육상 종목에 참가했다. 가장 빼어난 사례는 1960년대 초에 국제 중거리 육상계를 지배했던 피터 스넬Peter Snell이었다.

 

이들은 결코 속도가 느린 선수들이 아니었다. 이들 주자들, 특히 그간의 훈련을 제대로 완수해 몸 상태를 최고조까지 끌어올린 가장 끈기 있는 선수들은 자신의 에너지를 대부분 비축해두었다가 마지막 스퍼트 때 폭발적으로 쏟아냈다. "훈련하라, 그러나 무리하지는 말라. Train, not strain." 리디아드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에너지가 몸 밖으로 새나가지 않고 몸 안에 축적되도록 지도했다. 결국 그의 출발점은, 달리기란 주자에게 제대로 훈
련만 시킨다면 재미있고 유쾌한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젊은이들이 훈련 거리를 두 배, 세 배로 늘려 일주일에 100마일까지 달리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의사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 많이 달리면 내장 기관에 손상이 올 수 있다고 믿었으며, 현역 선수들도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가며 과도하게 혹사시키는 이런 훈련 방법을 두려워했다. 이러다가는 심장이 지나치게 비대해지고 체력
이 소진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속도를 낮춰서 장기간 훈련 함으로써 몸은 더 강해지고, 점차 더 많은 훈련을 견뎌낼 수 있게 되었다.

 

리디아드는 20세기의 다른 어떤 코치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오랫동안 활동적인 삶을 살면서 그는 많은 곳을 여행했고 수백 명의 기자들과 인터뷰를 했으며, 세계 여러 나라에서 강연과 코치 일을 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의 훈련법을 모방했고, 좀 더 발전된 변형 훈련법들이 등장했다. 그의 가장 위대한 공헌은 꾸준히 오랫동안 즐겁게 훈
련함으로써 유산소 기초 체력을 구축할 수 있다는 발상이다.

 

다른 많은 스포츠 종목들이 이 원리를 추구했고, 실제로는 우리의 삶 자체가 그랬다. 우리의 삶에서도 유년기와 청소년기까지의 형성기가 어른이 되었을 때 신체 건강의 밑바탕이 되는 것이다.


리디아드는 그의 오스트레일리아인 동료 퍼시 웰스 세루티와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달리기를 시작하기 전에 자신의 건강에 문제가 있고 체력이 퇴보하고 있음을 알아챘으며, 나중에는 달리기 코치 일을 일생의 업으로 삼게 되었다. 그들은 각자 단호한 입장을 갖고 있었고, 대중의 시선 앞에 자신들을 내세우고 싶어 했던, 왜소하지만 정력적인 사람
들이었다.